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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6. 6世 〉53. <부정공>사문(斯文)配 숙부인청산정씨묘갈명(淑夫人靑山鄭氏墓碣銘)
1. 문헌 목록 〉6. 6世 〉55. <광양공>증가선대부병조참판행광양현감공묘갈명(贈嘉善大夫兵曹參判行光陽縣監公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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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광양공>통정대부행천안군수공휘개보묘갈명通政大夫諱介甫墓碣銘(並書)
<광양공후>통정대부행천안군수공휘개보묘갈명(병서)通政大夫行天安郡守公諱介甫墓碣銘(並書) 嗚呼世元山東水越峴負震之原寔我玉川鄕先生退菴趙公之幽宅也舊傳愚伏鄭文肅嘗有基誌文云累經兵燹今無可徵則祇據滯誌輿家牒攸載而纂述之可乎謹按公諱介甫字叔汝本玉川望族世襲軒冕勝朝奉翊大夫版圖判書諱洪珪於公爲高祖判書生文科追封府院君諱佺府院君生門下侍中玉川府院君諱元吉曾輿臨圃隱李牧隅諸賢同誌協贊及天命有屬斂退于本郡自號農隱實國初五隱之一諡曰忠獻公獻生諱瑾卽公之考而始仕本朝出監光陽縣後贈兵曹參判妣貞夫人安東金氏司直啓溫基自出也公甫丱角受綱目日記數千言門老咸以瑚璉期待之迺從基仲父副正公瑜學得聞圃牧所傳天人性命之奧焚闌繼晷亹亹不止而宣德己酉叅於蓮榜蓋爲親屈也迨副正公獻 靖于江南諸般恩義之捲專屬于公公克守基範型內乎家庭井井然不紊外乎鄕黨彬彬焉有儀道臣累剗乃除以天安郡守天安多豪强時謂難治而公至不用朱墨縷絏而先服基衆心未一期官廨如僧舍是故間詣郡學集諸俊秀談經析義備陳今古治亂之由丕振儒化及基賦歸無他後賃只是雨三書笴而己後値朝家有慶特加通政之資云竊聞及公解紱吾鄕名材旋爾坌集討論其經史想其嘉訓精柝式多可傳而今據趙肅川鎭漙所叙家牒則曰先生所纂經義集說及四書小辨曾入於島夷兵燹且說愚伏堂爲言公有東方理學之正的淵源云嗟乎生諱歲月亦見逸於舊譜也配淑夫人南陽洪氏左贊成義之女用周人禮合祔于水越峴公墓之左育四男長曰東部參奉孟謙次曰仲謙叅奉曰仁謙壽職階嘉善次曰季謙可直二女適奇信中徐思勉皆仕人云孫曰瑚贈工判長房出曰鶴壽僉正二房出曰玲三房出曰鶴世郡守季房出曾玄以下繁不容載舊遵遺命墓前只用小碑后孫庸燮洪基俱憂世途滄桑與諸族協議方磨貞珉而特勞基幹曰亨基相龍東鎬俊鉉也衆謂以同鄕後進屬余敘寶三辭不獲遂爲之銘曰猗歟忠獻麗季歸淳獻靖先鄕篤于大倫一門忠孝聖朝嘉尙況彼肖孫金玉其相師不在外副正世父世父有受圃翁遺短先試諸外以觀儀表一方絃誦大刀割小何究不能何踐不理自謂末信念古君子脫然賦歸颺棹搖搖德山一壑我簞我瓢玉溫風範愈遠無斁墓門有貞百世可則 密平 朴寅 撰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행천안군수(行天安郡守)退菴公(퇴암공)諱(휘)介甫(개보)墓碣銘(묘갈명) 아! 세원산(世元山)동쪽 수월현(水越峴)의 부진지원(負震之原)에 묘소가 있으니 옥천(玉川) 퇴암선생(退菴先生)의 유택(幽宅)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우복(愚伏)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선생이 그 지문(誌文)을 썼다고 하는데 여러 번 병화(兵禍)를 겪어 고증할 수 없으므로 다만 군지(郡誌)와 가첩(家牒)에 따라 기록한다. 공의 휘(諱)는 개보(介甫)요 자(字)는 숙여(叔汝)인데 옥천(玉川)의 망족(望族)으로 대를 이어 관직에 오르니 고려조(高麗朝)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휘(諱)홍규(洪珪)가 고조이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부원군(府院君)에 추봉(追封)된 휘(諱) 전(佺)이 증조, 문하시중(門下侍中)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휘(諱) 원길(元吉)이 고조인데 일찍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 여러 현인들과 모여 뜻을 같이하여 왕실(王室)을 도왔으나 하늘이 장차 이씨(李氏)를 창성하게 하므로 순창군에 은퇴(隱退)하여 농은(農隱)이라 자호(自號)하니 실로 조선 초기 오은(五隱)의 한 분이시다. 뒤에 시호(諡號)를 충헌(忠獻)이라 하였다. 충헌공의 셋째 아들이 휘 근(瑾)인데 공의 고(考)로 조선에 벼슬하여 광양현감(光陽縣監)을 지내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되셨다. 어머니는 사직(司直) 안동(安東) 김계온(金季溫)의 따님이시다. 공은 어려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으셨다는데 날마다 수천 마디씩을 외니 문중의 어른들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에 숙부인 부정공(副正公) 유(瑜)에게 나아가 수학하여 포은과 목은 선생이 전한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설(說)을 배울 수 있었다. 선덕(宣德) 기유년(一四二九)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는데 이는 부모님의 명을 따른 것이다. 부정공께서 순천으로 이거하시어 모든 일을 공에게 위임하니 공이 능히 그 규범(規範)을 지켜 안으로 가정의 법도를 엄정(嚴正)히 하고 밖으로는 고을의 풍교(風敎)를 순화(醇化)시키니 도의(道意)있는 제자들이 모여 들었으며 이들의 권유로 천안군수(天安郡守)의 부름에 응하셨다. 당시 천안군에는 호강(豪强)한 자들이 많이 살고 있어 다스리기가 어려웠으나 공은 형벌(刑罰)을 쓰지 않고 군민의 마음을 감복시켜 1년도 못되는 사이에 관아(官衙)가 조용하게 되었다. 정사하는 여가에는 군학(郡學)에 나아가 학생들과 함께 경서(經書)를 강론(講論)하여 의리(義理)를 분석하고 고금의 치란(治亂)을 밝히니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振作)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두 세 개의 책상자만 싣고 와 행장(行裝)이 쓸쓸하였는데 그 뒤에 조정에 경사(慶事)가 있어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내가 듣기로 공께서 고향에 돌아와 수재(秀才)들을 모아 경서를 가르쳤다고 하니 아름다운 가르침이 많이 전하여졌을 것이나 이제 숙천부사(肅川府使) 조진부(趙鎭溥)가 써놓은 가첩(家牒)을 살펴보니 선생이 찬술한 경의집설(經義集說)과 사서소변(四書小辨)이 임진왜란에 불탔다고 하며 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께서 공을 가리켜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정통 연원(淵源)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공에 대한 자세한 사적이 구보(舊譜)에 기록되지 않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배위(配位) 숙부인(淑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좌찬성(左贊成) 홍의(洪義)의 따님이신데 돌아가시자 주(周)나라의 예(禮)에 따라 공의 묘 왼쪽에 합장하였다. 아들 넷을 낳으셨는데 장남은 동부참봉(東部參奉) 맹겸(孟謙)이요 차남은 중겸(仲謙)인데 참봉이며 삼남 인겸(仁謙)은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사남 계겸(季謙)은 사직(司直)이다. 두 딸은 기신중(奇信中)과 서사면(徐思勉)에게 출가하였다.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된 손자 호(瑚)는 맹겸의 아들이요 첨정(僉正) 학수(鶴壽)는 중겸의 아들이요 흡(洽)은 인겸의 아들이요 군수를 지낸 학세(鶴世)는 계겸의 아들이요, 증손(曾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공의 묘전(墓前)에 작은 비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비바람에 마멸되어 후손 용섭(庸燮)과 홍기(洪基)가 여러 족인과 의논하여 새로 비석을 세우게 되었는데 이 일은 형기(亨基) 상룡(相龍) 동호(東鎬) 준현(俊鉉) 등이 주관하여 애를 썼다. 이에 동향(同鄕)의 후진(後進)들이 찾아와 묘갈명을 청하기에 사양하다가 마침내 되지 않아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猗歟忠獻 麗季歸淳 獻靖先鄕 篤于大倫 훌륭한 충헌공 고려말에 돌아오시어 고향에 은둔하여 절의 지키며 인륜을 밝히셨네 一門忠孝 聖朝嘉尙 況彼肖孫 金玉其相 한 집안의 충효를 세종께서 아름답게 여겼으며 더군다나 그 자손들은 금옥처럼 훌륭하네 師不在外 副正世父 世父有受 圃翁遺短 백부 부정공에게 학문을 배우시고 부정공은 포은의 학문을 이어 배우셨네 先試諸外 以觀儀表 一方絃誦 大刀割小 먼저 외향에서 시험하여 모범을 보이시며 작은 천안 고을 한가롭게 다스렸네 何究不能 何踐不理 自謂末信 念古君子 학문을 연구하고 의리를 실천함 지극하여 생각하건데 참으로 옛날의 군자이셨네 脫然賦歸 颺棹搖搖 德山一壑 我簞我瓢 태연히 벼슬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시니 덕산 한 골짜기 은거할 고장이네 玉溫風範 愈遠無斁 墓門有貞 百世可則 덕을 감추시고 풍교 펴시어 더욱 빛나고 묘전의 비석 백세까지 모범이 되리라 辛酉年 十月 密平 朴寅燮 삼가 지음 戊戌年(一九九四) 三月 敎官公 十八世孫 乙勳 삼가 씀 이비석은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문자(文字)를 알아보기가 어려워 후손들이 상의하여 사직공(司直公)의 17세손 상훈(尙勳)이 삼가 새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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